덩굴검 둘레로 마력을 투영했다. 거대한 기둥 형태의 역장을 만들었다.
잡초를 뽑는 농부처럼 덩굴검을 휘둘렀다.
크게 휘두를 때마다 죽은 것과 산 것 사이의 것들이 부서졌다.
“준영님…. 라미아님을 도와주세요.”
라미아의 제사장이 된 누가엘이 나를 불렀다.
타락한 수호자 엘과 라미아의 전투에 내가 개입하기를 염원했다.
“아니.”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누가엘은 보지 못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이 전투는 라미아에 어울리는 고난이었다. 수호자 엘은 라미아의 도약을 이끌 수 있는 벽이었다.
수호자 엘이 찌른 레이피어가 라미아의 갑옷을 찢었다.
뱀 몸의 비늘을 부수고 상처를 입혔다.
“크윽.”
라미아의 신음이 들려왔다.
“지지 않아.”
그럼에도 라미아는 투지를 잃지 않았다.
나는 덩굴검을 늘어트렸다.
묵묵히 마력을 투영하고 휘둘렀다. 엘프의 몸이 사용된 키메라를 파괴했다.
“준영님….”
누가엘이 다시 한번 나를 불렀다.
다만, 나의 개입을 바라는 애원이 아니었다. 누가엘이 할 수 있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누가엘이 내게 부서지고 라미아의 불에 태워져 재가 된 이들을 위로하며 이끌었다.
***
나는 [급속 생장]을 반복해서 썼다.
싹이 작은 나무가 되고, 작은 나무가 큰 나무가 되기 위한 시간을 내가 단축시켰다.
숲이 이루어졌다.
숲이 점점 커졌다.
마냥 약했던 엘프들, 숲이 점점 커짐에 따라 상처를 회복하고 능력까지 상승하기 시작했다.
회복한 엘프들이 누가엘을 보호했다. 커진 숲의 끝으로 나아가 키메라들을 공격했다.
라미아의 화염이 더욱 크게 불타올랐다.
보호의 권능이 담긴 화염은 나무와 함께했다. 나무를 태우지 않고도 나무를 타고 올라와 넘실거렸다.
“너, 너는 이제 죽어도 돼. 사라져도 돼. 너의 의무는 끝났어. 죽은 것이 되어서도 끝나지 못한 너의 의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난 수호자.”
“지킬 것을 잃어버린 수호자지.”
라미아의 오른손에 든 정글도가 수호자 엘의 레이피어를 쳐냈다.
쳐내고 만든 빈틈을 왼손의 정글도가 노렸다.
수호자 엘 역시 다른 손의 레이피어를 끌어당겼다. 하지만, 불타는 공기가 엘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런가.”
정글도가 수호자 엘의 가슴에 큰 상처를 냈다. 뼈까지 갈라냈다.
“의무가 사라졌는가.”
라미아의 정글도가 원을 그렸다.
공격이 이어지며 원이 중첩되었다. 화염을 머금으며 만들어진 원이 수호자 엘의 가슴을 갈랐다.
갈라진 뼈끝에 불이 붙었다.
수호자 엘의 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너 역시 다른 엘프처럼 흙으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 다시 나무가 되어라.”
“나도 나도….”
수호자 엘이 멈췄다.
멈춘 채 타올랐다.
위로하는 누가엘의 애절한 기도가 멈춘 수호자 엘을 감쌌다.
수호자 엘이 무너져내렸다.
누가엘의 기도가 낙하하는 속도를 늦췄다. 부드럽게 지상에 닿도록 인도했다.
흙으로 숲으로 돌아갔다.
“흐윽, 흑.”
추모하는 누가엘의 눈물만이 남았다.
***
나는 덩굴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검에 묻은 잔해를 털어냈다.
“라리샤, 잠깐.”
“뮴.”
라리샤가 고개를 끄덕이고 뒤로 물러났다.
“타락한 수호자.”
덩굴검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는 과연 홀로 타락했을까? 그리고, 타락한 그에게 키메라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은 누굴까?”
물론, 스승과 제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괴로워하는 수호자에게 권능으로 지식을 밀어 넣은 것이다.
멸절자 대검에 엉긴 드래곤의 뼈에 의지를 담았다.
덩굴검으로 하나가 된 멸절자 대검과 드래곤의 뼈가 공명했다. 나의 마력을 바탕으로 이적을 이끌었다.
“라미아. 내게 화염을.”
수호자 엘이 쓰러트린 후, 몸을 천천히 이완하고 있던 라미아가 나의 말에 다시 결의를 다졌다.
누가엘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수호자 엘을 상대할 때보다 쉽게 투지를 일으켰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이를 쓰러트리며 느낀 죄책감을 덜어낼 기회였다. 자신들을 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원흉에 향해 분노를 터트리는 것이 더 쉬웠다.
넓게 펼쳐진 숲.
숲에 머문 엘프들이 라미아를 추종했다.
누가엘을 통해 라미아에게 모여진 신앙이 화염이 되었다.
화염이 내게 닿았다. 뱀처럼 내 몸을 감으며 올라온 화염이 덩굴검에 닿았다.
드래곤의 뼈가 화염을 머금었다. 붉게 빛났다.
미묘하게 꺼려지던 곳을 향해 덩굴검을 내리그었다.
공간을 베어냈다.
베어낸 공간에서 마치 피처럼 검은 것이 흘러내렸다.
“필멸자가 감히.”
베어낸 공간 너머에서 격이 높은 것이 중얼거렸다.
“필멸자라?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나? 인간을, 아인족을 필멸자라 비하하는 것은 너의 오만이다. 아직 영원하지 못하기에, 인간을 보고 자신이 영원할 거라고 스스로 속이는 거짓이다.”
“끌려와서 비틀린 주제에 입은 열렸구나.”
“유적에 갇혀 있는 너도 마찬가지.”
‘신성? 아니, 부족해.’
슬라임 등을 상대하면서 느껴졌던 저 너머의 신성보다는 못했다.
그 신성들은 유적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었다. 유적을 비롯한 이쪽 세계 밖에서 주사위를 굴리는 존재였다.
하지만, 베어낸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존재는 이쪽에 가까웠다.
“큭.”
그렇다고 해도 강력했다.
장막 뒤에 숨은 채로도 수호자 엘을 타락시켰던 준신성.
베어낸 공간으로 일부만을 드러내는 데도 침음이 흘러나왔다.
“라리샤, 라미아의 뒤로.”
나의 후퇴 권유에 라리샤가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당신을 뚫지 못하지요?”
“그래. 그렇게 해낼 거다.”
“그럼, 저는 안전해요.”
라리샤가 미소 지으며 나의 등 뒤에 숨었다.
“하.”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라미아의 격이 오르는 동안, 라리샤 역시 놀고만 있지 않았다.
특히 나와의 인연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라리샤의 성장했다. 라리샤를 보호하기 위해 적을 공격하기 위한 힘을 아낄 필요가 없다.
내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라리샤 역시 쓰러지지 않는다.
라리샤는 내가 어떻게 움직이든 나의 뒤에 머물 것이다.
나는 적에게 집중했다.
***
공간이 삐걱거렸다.
“본체인가?”
그것이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력이 공간을 채우면서 일어나는 마찰만으로도 그것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이력이 가득 채워진 공간으로 흘러내린 검은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검은 것이 파충류의 발로 변했다. 발에 이어진 부분은 깃털을 가진 새의 날개로 변했다.
그렇다고 해도 새가 아니었다. 마치 동물원의 모든 동물이 하나의 덩어리로 이어진 것 같은 기괴한 형태.
그것이 베어낸 공간에서 이곳, 유적 지하 3층으로 현신했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조립자.’
내가 그것의 이름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빠듯하게 주변을 장악한 그것이 존재를 과시했다.
자신의 이름을 강요했다.
조립자의 일부분이 꿈틀거렸다.
여러 동물의 눈이 각각의 외형을 가진 채 이쪽을 바라보았다.
야생 동물은 눈 모양을 싫어했다. 자신을 노리는 천적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신성 앞에서는 야생 동물과 다르지 않았다.
거기에 조립자의 수작은 한 단계 더 나아갔다. 시선에 피어를 머금었다.
공포에 저항하지 못하면 몸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숨도 쉬지 못하고 그대로 죽을 것이다.
“어딜.”
나는 붉게 불타는 덩굴검을 휘둘렀다.
“수준 낮은 수작.”
이미 나는 평범한 인간 수준을 넘었다.
나의 수준을 추측할 수 있을 텐데도, 저 신성 ‘조립자’는 눈알 괴물이 하던 짓을 내게 하고 있다.
“신성이 되기를 원하면 신성에 맞는 격을 보여라.”
나는 덩굴검을 계속해서 휘두르며 조립자를 도발했다.
이전에 접했던 다른 신성은 굳이 도발할 필요 없었다. 그들을 모욕해 이쪽으로 넘어올 이유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을 향한 모욕은 ‘명분’이 될 수 있다. 명분은 규칙을 우회할 수단이 될 수 있다.
신성은 극단적인 힘을 가지면서도 규칙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저 ’조립자‘는 달라.’
신성이 받는 규칙을 제한당하고 있지 않다.
화신 등으로만 개입하던 저 너머의 신성과 달랐다.
‘제대로 된 신성이 아니다.’
규칙에 얽매이지 않을 정도의, 규칙으로 제한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다른 신성에 비하면 격이 낮다.
‘준신성.’
‘규칙’이 무엇을 위해 세워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성이 본진 세계를 비롯한 유적에 직접 권능을 발휘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내가 본진 세계에 마왕성과 함께 올 수 있었던 것부터 규칙의 힘이었다.
나를 소환한 검은 미녀에게도 규칙이 적용되었기에 나는 마왕성이라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다.
“신성이 아니기에 신성다운 격을 보이지 못하는 건가. 그렇다면 내게 밟혀라. 널 밟고 내가 올라갈 테니까.”
나의 말에 조립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수많은 동물의 입으로 말했다.
“찢어져라. 찢기고 조각이 되어 나의 일부가 되어라.”
적의를 품은 조립자의 말이 이력을 담고 밀려들었다.
나는 덩굴검을 휘둘렀다.
이력과 나의 의지가 충돌했다. 밀려드는 말의 이력을 타오르는 화염으로 태웠다.
이어지는 공격.
수십 개의 유인원 손이 검은 것으로부터 뻗어져 나와 나를 노렸다.
나는 덩굴검을 반 바퀴 휘둘렀다.
콰앙-.
의지뿐만 아니라 물리력과 물리력의 충돌.
유인원의 손이 튕겨 나가고 나 역시 반발을 느꼈다.
그러나, 반발을 손해로 잇지 않았다. 반발을 이용해 반대로 원을 그렸다.
원을 그리며 갈무리한 힘에 나의 스타베팅 더했다.
‘끄윽.’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은 것만 같았다.
“흥.”
나는 짧게 숨을 토해내고 덩굴검을 어깨에 걸쳤다.
분명 데미지가 들어갔다. 조립자의 존재 유지에 아무런 타격이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고 해도 분명 피해를 줬다.
검은 것에서 새의 대가리가 떠올랐다. 하나둘이 아닌 수백 개가 떠올라 표면을 덮고 있던 다른 종류의 동물 일부를 덮었다.
전면으로 밀려들었다. 파도가 되어 몰아쳐 왔다.
“네놈이 왜 신성이 되지 못했는지 알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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